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는 1번 고속도로 바로 옆에 위치한 유적으로 최근에 국립공원으로 새롭게 단장한 곳이다. 제2성전시대의 동굴 거주지, 저수조, 건물흔적이 남아있다. 또한 비잔틴 시대에 이곳에 세워져 있던 여관의 기초와 모자이크 장식들도 볼 수 있으며, 십자군 시대의 저수조도 구경할 수 있다. 이런한 유적들은 이곳이 아주 오래전부터 예루살렘을 오가는 수많은 순례자들이 거쳐갔던 중간지점 역할을 했음을 증명하고 있다. 유대광야에 대한 포스팅에서도 언급했듯이 여리고에서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은 거칠고 험하다. 



 누가복음에서 예수님이 말씀하신 비유에는 이 길에서 강도를 만난 사람과 그를 치료한 사마리아인이 등장한다. 아마도 사마리아인이 강도 만난 사람을 치료하고 숙박비를 준 여관이 이 여관일 수도 있다. 물론 이것은 어디까지나 그저 가능성이 높은 추측일 뿐이다. 그러나 이곳에서 예수님의 비유를 생각하면 조금 더 피부에 와닿게 느껴지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제2성전 시대의 것으로 거주용으로 사용하던 동굴을 발굴한 모습이다.


비잔탄 시대에 여관에서 사용하던 물을 받아두던 저수조다. 속이 굉장히 넓고 깊은데, 이것으로 당시 대략적인 여관의 크기를 짐작할 수 있다.


제2성전 시대에 이 자리에 있었던 건물의 흔적이다.


 아래 그림은 이곳에 있는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는 비잔틴 시대 모자이크 유적들의 일반적인 패턴이다. 이스라엘을 여행하다가 어떤 건물에 오래되어 보이는 모자이크를 본다면 그 건물은 4~7세기 사이의 비잔틴 시대의 것일 확률이 99% 이상이다. 모자이크 양식은 비잔틴 시대를 대표하는 예술품이다. 이곳에서도 다양한 모자이크가 발굴되었으며 공원내 박물관에는 이스라엘 각지에서 가지고 온 모자이크들이 전시되어 있다. 





WRITTEN BY
Pastor Hwang
성경과 성지의 살아있는 연결을 추구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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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쿰란을 비롯한 사해 일대에서 1세기의 성경사본이 발견되던 때에 학자들은 긴장했다고 한다. '혹시 지금 우리가 가진 성경이랑 다르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물론 걱정은 기우에 그치고 말았다. 쿰란 제4동굴에서는 완벽하게 보존된 이사야서 사본이 발견되었다. 이전까지 가장 오래된 구약성경 사본은 레닌그라드 사본으로 기원후 1,000년경의 사본이다. 하지만 1세기의 쿰란사본과 레닌그라드 사본은 거의 완벽하게 일치함을 보여주었다. 이 발견으로 말미암아 성경의 사본상의 오류와 편집을 주장하던 쪽에서는 별로 할 말이 없어지게 되고 말았다. 천년을 뛰어넘은 실로 엄청난 발견이었다.


 예루살렘에서 1번 국도를 타고 여리고를 지나 90번 도로로 우회전 후 10분 가량 달리면 쿰란 국립공원이 눈에 들어온다.


쿰란 남쪽 상공에서 북쪽을 바라보고 촬영한 사진이다. 쿰란 공동체 유적을 한 눈에 살펴볼 수 있다.


 쿰란 유적지를 살펴보면 인상적인 것이 수도시설이다. 헬리캠 상공 사진에서 보이듯이 이곳은 메마른 땅이다. 그러나 쿰란 공동체는 대규모 저수시설을 마련해서 비로 내린 물을 모았고, 그 물들을 공동생활 구역에 곳곳에 보내는 시설을 갖추었던 것으로 보인다. 학자들은 1세기 당시에 이곳에서 200~300명 가량이 생활했던 것으로 여기고 있다. 아래 영상은 쿰란 전경과 쿰란 상공에서 바라본 사해의 모습니다(720p 60fp로 재생하면 훨씬 선명합니다.).

이 정도 규모의 저수시설이 공동생활 구역 내에 여러군데 있다.


 쿰란 공동체가 주목받는 이유는 그들이 남긴 성경필사본 때문이다. 수도사들은 절벽에 있는 동굴과 이 거주시설을 왔다갔다 하면서 생활했던 것으로 보인다. 특이한 것은 쿰란 상공사진에서 성경필사방으로 표시된 부분에서 잉크와 팬 그리고 커다란 필사대가 발견되었다는 점이다. 학자들은 성경과 기타 여러 문서들을 공부하고 필사하는 것이 쿰란 공동체의 중요한 일 중 하나였을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성경필사방에서 발견된 책상이다. 필사하면서 썻던 것으로 보인다.


 쿰란 공동체는 1세기 말 무렵 로마가 쳐들어 온다는 소식을 듣고 베들레헴으로 피신하게 된다. 그리고 수도사들은 그들의 필사문서들을 쿰란 주변 동굴에다 숨겨놓았다. 아마도 그들은 얼마 지나지 않아 정국이 안정되면 자신들이 숨긴 문서들을 찾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 필사문서들이 다시 세상의 빛을 보기까지는 이천년에 가까운 시간이 걸리고 말았다. 정말 신기한 것이 이천년이라는 기간동안 동물의 가죽에 잉크로 필사한 문서들이 거의 완벽에 가까운 상태로 보존되었다는 사실이다. 아래 사진은 쿰란에서 가장 많은 양의 문서와 성경사본 그리고 완벽히 보존된 이사야서 사본이 발견된 쿰란 제4동굴을 찍은 것이다.


쿰란 4-C 동굴. 쿰란 유적 바로 옆에 있고, 온전한 이사야서 사본이 발견된 곳이라 쿰란 동굴 중에서도 가장 유명하다.


 아래 영상은 지상에서 잘 보이지 않는 쿰란 제4동굴 모습을 근접촬영한 것이다(720p 60fp로 재생하면 훨씬 선명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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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stor Hwa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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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루살렘에서 1번 고속도로를 타고 여리고를 지나 90번 도로에서 우회전 하여 사해 해변을 30분 가량 달리면 엔게디 국립공원 표지판이 보인다.


상공사진에서 보이듯이 깍아지를듯한 골짜기가 사해까지 이어져있다. 엔게디엔 자연동굴이 많다.


 다윗이 사울을 피해 피신한 지역이다. 메마른 유대광야에 있지만 엔게디는 맑은 물이 사시사철 샘솟고 폭포까지 있는 최고의 오아시스다. 엔게디를 발굴한 결과 이곳에는 아주 오래전부터 사람들이 살아왔던 것으로 밝혀졌다. 다윗이 이곳을 피난처로 삼은 것도 위 사진에서 보이듯이 이곳이 지형이 가파르고 숨기에 좋았던 것도 이유였겠지만 물을 계속해서 공급받을 수 있었던 데에도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사울은 이곳으로 삼천명의 군사를 이끌고 와서 다윗을 찾으려 했다. 하지만 이 곳 엔게디의 한 굴에서 볼일을 보다가 다윗에게 목숨을 잃을뻔 하였다. 다윗은 자신을 죽이려는 사울 왕을 충분히 죽일 수 있는 기회가 있었지만 사울을 살려줬다.


 현재는 이스라엘에서 국립공원으로 지정하고 특별히 자연보호에 중점을 두고 관리하고 있다. 그래서인지 엔게디 입구에서부터 유유히 걸어다니는 산양을 심심찮게 구경할 수 있다. 아래 영상은 헬리캠으로 엔게디 최상부 폭포에서 시작하여 다윗 와디의 상부와 사해까지 이어지는 뷰를 담았다(720p 60fp로 재생하면 더 선명합니다.).

 그리고 다윗 와디를 따라 계곡을 쭉 따라 올라가다 보면 굴이 계속 시야에 들어온다. 자연적으로 생긴 동굴들인데, 아마 다윗도 이런 동굴들 중 하나에 피신했을 것이고, 사울이 볼 일을 보러 들어간 곳도 이런 동굴이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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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stor Hwa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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