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리고아이를 잇달아 함락시킨 이스라엘은 가나안에 거주하던 원주민들에게 재앙같은 존재였다. 이때 허름한 차림새의 사신단이 여호수아를 찾아왔다. 그들은 기브온 거민들이었다. 기브온은 한 장소를 지칭하기도 하지만 아얄론에서 예루살렘 북쪽까지 이어진 넓은 골짜기 전체에 거주하던 기브온-히위 족속 사람들의 이름이기도 하다. 기브온은 벧엘과 예루살렘 사이에 위치한 도시로서 이스라엘이 정복해야 할 대상이었지만, 여호수아는 기브온 사신들의 행색에 속아 넘어가 평화조약을 맺었다. 


현지 지명은 el-Jib이다. 2015년 1월 현재 이스라엘에서 일부 팔레스틴 지역에 쌓아올린 장벽 때문에 출입이 불가능한 지역이다. 사진은 나비 사무엘에서 조금 내려간 지점에서 헬리켐을 날려 찍었다.


 기브온 사람들이 살던 도시들은 해안평야에서 아얄론 골짜기를 지나 예루살렘을 비롯한 산지지역으로 가는 주요통로가 지나는 곳이다. 이 지역 아래 위로는 비교적 높은 산악지역이 이어져서 이동이 용이하지 않다. 그래서 고대로부터 병력이동과 물자수송을 위한 매우 중요한 지역이며, 가나안을 정복해야 하는 이스라엘로서도 이 지역을 점령함으로서 가나안을 남북으로 가를 수 있는 작전상 요충지였다. 네개의 기브온-히위 족속 도시가 성경에 나오는데 기브온, 그비라, 브에롯, 기럇여아림이다. 이집트와 로마의 병력도 예루살렘을 포위하기 위해 이 길을 따라 예루살렘 북쪽에 도달했다오늘날 브에롯을 제외한 세개의 도시들은 거의 정확한 위치를 알 수 있다. 2015년 1월 현재 기럇여아림만 출입이 가능하고 나머지 도시들은 들어갈 수 없는 상황이다. 


가나안 정복 당시 이스라엘은 아이성 점령 후 기브온을 반드시 손에 넣어야지만 정복을 순조롭게 진행할 수 있는 여건이었다.


 기브온은 여호수아의 가나안 남부정복에 있어서 나름 중요한 역할을 했다(기브온 기습과 추격전 포스팅을 참조).또한 그 전투 와중에 태양이 기브온 위에 머무는 기적이 일어난 곳이기도 하다. 후에는 솔로몬이 이곳에서 하나님께 일천번제를 올렸고 엄청난 지혜를 선물로 받았다. 


















WRITTEN BY
Pastor Hwang
성경과 성지의 살아있는 연결을 추구하는

,

 여리고가 흙무더기라면 아이는 돌무더기다. 둘다 지금 현재는 완전한 폐허이지만, 여리고에 대한 포스팅에서 봤듯이 여리고와 아이는 전혀 다른 풍경을 가지고 있다. 여리고는 흙만 남은 폐허이지만, 아이는 돌만 남은 폐허이다. 여리고성과는 달리 아이성의 위치를 두고는 여려가지 견해가 있다. 하지만 현재까지는 고대도시 벧엘(지금 현재의 Baytin)에서 남동쪽으로 2Km 가량 떨어진 Et-tell이 여러가지 면에서 성경시대의 아이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Et-tell 상공 200m에서 촬영한 아이성의 모습.


 여리고성을 점령한 이후 이스라엘은 선택의 기로에 놓인다. 여리고에서 당시 여부스 족속이 점령하고 있던 오늘날의 예루살렘으로 진격할지, 약간 남쪽에 있는 베들레헴을 공격할지, 아니면 약간 북쪽에 있는 아이성을 점령할 것인지. 이스라엘의 선택은 아이성이었다. 여리고에서 오늘날의 Wadi Makkuk을 따라 진군하면서 벧엘 부근의 고원지대로 진출했다. 아이성은 여리고성과 비교하면 작은 성이었기에 이스라엘은 소수병력만을 보내 성을 공략했다. 하지만 패배하고 만다. 이유는 아간의 범죄 때문이었다. 여리고성에서 약탈을 금지한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귀중품을 숨긴 아간이 돌에 맞아 죽고나서야 아이성 전투는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이 전투의 상황을 묘사한 여호수아서의 기록과 Et-tell의 지형적 조건은 상당히 잘 맞아떨어진다. 일단 여호수아와 이스라엘은 전병력을 이끌고 아이성 맞은편 북쪽 언덕에 진을 친다.



 그리고 동시에 여호수아는 오천명의 병력을 본진 건너, 아이성 서쪽 지역에 매복시킨다.



 여호수아 8장은 당시의 상황을 자세하게 알려준다. 

"여호수아가 그 밤에 골짜기 가운데로 들어가니. 아이 왕이 이를 보고 그 성읍 백성과 함께 일찍이 일어나 급히 나가 아라바 앞에 이르러. 정한 때에 이스라엘과 싸우려 하나 성읍 뒤에 복병이 있는 줄은 알지 못하였더라. 여호수아와 온 이스라엘이 그들 앞에서 거짓으로 패한 척하여 광야 길로 도망하매" 

 아래 영상은 아이성 전투의 상황을 영상으로 재구성한 것이다(1080p로 재생하면 선명합니다.).


 오늘날 Et-tell엔 돌만 가득하다. 


Et-tell 남쪽부분


Et-tell 중앙부분


Et-tell 서쪽부분




WRITTEN BY
Pastor Hwang
성경과 성지의 살아있는 연결을 추구하는

,

 오늘날 여리고에서 북쪽으로 조금 올라가다 보면 시험산 입구에 거대한 흙무더기가 보이는데 이곳이 고대 여리고성이다. 오늘날엔 Tell-es-sultan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다. 사실 성경을 비평적으로 보는 사람들과 고고학자들에게 여리고는 참 어려운 동네다. 왜냐하면 여리고에는 여호수아의 이스라엘 군대가 여리고를 정복했다는 확실한 고고학적 증거가 없기 때문이다(출애굽과 광야 40년도 마찬가지). 그래서 많은 학자들로부터 출애굽과 함께 신화적 이야기 취급을 당하는 것이 여호수아서에 기록된 여리고 정복의 기록이다. 

 일련의 이런 움직임들은 성경의 권위가 땅에 떨어졌기 때문에 일어나는 일이다. 하지만 확실히 짚고 넘어가야 할 부분이 있다. 현재까지 이스라엘의 여리고 정복을 뒷받침하는 고고학적 증거가 발견되지 않았을 뿐, 요단강을 건넌 이스라엘이 여리고성을 정복했다는 사실을 뒤집을 만한 명백한 증거가 나온 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 증거가 없다는 이유로 성경 역사를 과감히 부정하는 것은 바른 자세가 아니다.


파란색: Gastang의 발굴작업 / 빨간색: Kenyon의 발굴작업 / 녹색: Kenyon이 발굴한 절개단층. Tell-es-sultan의 남쪽에서 북쪽을 바라보고 찍은 상공사진.


 고대사회에서 방어가 잘 되어있는 성을 공략할 때는 규칙이 있다. 일반적으로 추수 바로 직전에 성을 공격한다. 그래야만 성 주변의 곡식이 성을 공격하는 군사들의 식량이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스라엘은 봄에 요단강을 건너고 길갈에서 유월절을 지킨 다음, 가나안의 추수가 끝난 후에 여리고를 공격했다. 실제로 여리고를 발굴했을 때 학자들은 185리터에 달하는 곡물을 발견했다. 점령당한 성에서 곡물이 나왔다는 것으로부터, 여리고는 다른 고대도시들처럼 포위에 의한 기근으로 멸망한 것이 아닌 것이 분명해진다. 그렇다고 침략자들이 곡물을 약탈한 것도 아니다. 곡물이 남아있다. 이런 정황들은 이스라엘이 여리고성을 공략한 것으로 설명하면 모든 의문이 풀린다. 

 여호수아서에 의하면 여리고 공략은 일반적인 군사공세와 포위가 아닌 특별한 방법으로 이루어졌다. 또한 여리고는 하나님께 온전히 바쳐졌기에 성을 점령한 후에 일체의 약탈은 금지되었다. 그래서 성이 무너지고 난 다음에도 곡식들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던 것이다. 


망대의 크기와 주변의 성벽을 보면 고대 여리고의 크기를 짐작할 수 있다.


고대 망대 안쪽 발굴지의 모습이다.


Tell-es-sultan 서쪽 성벽 절개 단면의 모습. 성벽이 바깥으로 무너지면서 성벽 하단부에 진흙층이 두껍게 쌓인 것을 확인할 수 있다.


Tell-es-sultan의 남쪽 발굴지다. 1950년대에 Kenyon이 발굴한 것을 최근에 Wood가 BC 1,400년으로 연대를 측정한 지역이다.


 여리고의 흙무더기에 폐허에 올라서 있으면 때로 여호수아 당시의 함성이 귀에 들리는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크고 높았던 성은 사람의 힘이 아닌 하나님의 능력으로 무너졌다. 오늘날의 이 곳 여리고의 폐허는 하나님의 승리를 보여주고 있다. 아래 영상은 Tell-es-sultan 상공 150m 지점에서 촬영한 영상이다(1080p로 재생 가능합니다.).






WRITTEN BY
Pastor Hwang
성경과 성지의 살아있는 연결을 추구하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