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호수아 10장의 기록에 의하면 라기스는 기브온에서 시작된 가나안 남부 원정 때 이스라엘 군대가 정복한 도시다. 라기스는 아래 사진에서 볼 수 있듯이 사방이 푸르른 비옥한 지대에서 일찍이 도시로 발전했다. 이스라엘이 여리고와 아이를 점령한 이후 아모리 족속의 다섯 왕들이 여호수아와 동맹을 맺은 기브온을 치러 올라왔을 때 언급되는 다섯 왕들의 도시 중 하나로도 등장한다. 


라기스 서쪽 상공에서 동쪽을 바라보고 촬영했다. 비옥한 쉐펠라 지대 한가운데 솟아오른 라기스의 모습이다.


 여호수아의 정복 이후 라기스는 오랫동안 버려진 도시로 남아있었다. 하지만 라기스는 엘라골짜기에서 블레셋과 국경을 마주했던 아세가와 마찬가지로 블레셋 도시 가사와 아스돗과 국경을 마주하고 있었다. 그래서 솔로몬의 아들 르호보암이 라기스를 요새화 했고, 이후 히스기야는 더욱 강한 성벽들로 라기스를 보강했다. 라기스에서 발굴된 성벽의 흔적들로 보아 당시 라기스는 외벽의 두께가 3m이며 내벽은 6m나 되는 이중 성벽을 가지고 있었다. 아래 영상은 라기스 일대를 헬리캠으로 촬영한 것이다(1080p로 재생하면 더 선명합니다.).

 지리적으로 라기스는 지중해를 따라 이어진 해안도로에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갈 수 있는 길목에 위치해 있다. 주전 722년 북이스라엘을 정복한 앗수르는 남쪽으로 내려오면서 지중해변에 있던 블레셋 도시들을 차례로 파괴했고 이집트 북부지역까지 내려갔다. 당시 남유다는 정말 다행스럽게도 당시 침공을 주도했던 사르곤 왕이 암살당하면서 앗수르의 침공에서 가까스로 살아남을 수 있었다. 사르곤의 죽음과 함께 본국으로 돌아간 앗수르는 사르곤의 아들 산헤립의 지휘 아래 전열을 재정비하여 남유다를 다시 공격했다. 


 열왕기하 18장을 보면 산헤립이 남유다 정복을 시도하면서 라기스를 정복하고 예루살렘까지 위협했다는 기록이 등장한다.

"유다의 왕 히스기야가 라기스로 사람을 보내어 앗수를 왕에게 이르되 내가 범죄하였나이다 나를 떠나 돌아가소서 왕이 내게 지우시는 것을 내가 당하리이다 하였더니 앗수르 왕이 곧 은 삼백 달란트와 금 삼십 달르트를 정하여 유다 왕 히스기야에게 내게 한지라 히스기야가 이에 여호와의 성전과 왕궁 곳간에 있는 은을 다 주었고 또 그때에 유다 왕 히스기야가 여호와의 성전 문의 금과 자기가 모든 기둥에 입힌 금을 벗겨 모두 앗수르 왕에게 주었더라" 

 남유다를 포위한 산헤립의 기세는 실로 대단해서 예루살렘이 무너져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였지만 다시 한 번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산헤립은 물러간다. 당시 산헤립은 라기스를 라기스에서의 이 전투를 기념하면서 자신의 궁전 벽에 부조로 새겼는데, 오늘날 이 부조는 당시 라기스의 모습, 앗수르의 공성전 전술, 이스라엘의 방어 전략, 당시 군인들의 복장과 무기 등에 관한 정보들을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다.


왼쪽은 앗수르군이 토성을 쌓고 널판지와 가죽을 깔아 라기스를 공격함과 동시에, 이스라엘 군이 방어탑에서 활과 투척무기로 방어하는 모습. 오른쪽은 라기스 함락 이후 이스라엘 병사들을 처형하는 장면.


산헤립 궁에 있는 부조를 옮겨 놓은 것으로 고고학 사전의 형태로 출판된 상태다.


공성을 위해 앗수르가 쌓아올린 흙무더기를 상공에서 촬영했다.


토성을 아래에서 위로 올려다 본 모습이다.


내벽에 있는 성문의 흔적이다.


당시 성벽의 두께를 짐작할 수 있다.


라기스는 발굴이 계속 진행되고 있다. 이스라엘 정부 차원에서 국립공원 지정하려는 노력이 계속되고 있는 상태다.


라기스 북쪽 사면에서 발굴된 우물이다.


우물의 깊이가 상당히 깊다.



WRITTEN BY
Pastor Hwang
성경과 성지의 살아있는 연결을 추구하는

,

 이전에 다루었던 포스팅에서 조금 더 들어간 내용이다. 와디 다르가는 쿰란에서 엔게디로 가는 길 중간에 있다. 쿰란에서 엔게디로 내려가다 보면 군인들이 검문을 하는 체크포인트가 있는데, 체크포인트를 통과하지 말고 와디 다르가 표지판을 따라 우측으로 진입해서 약 10여분 정도 비탈길을 계속해서 올라가다 보면 와디 다르가 탐방 코스가 적혀있는 국립공원 표지판이 나온다. 보통은 입구에 있는 큰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구경하지만 탐방로를 따라 40분 정도 걸어들어가면 첫번째 전망대에 도착한다(4륜 구동 차량은 탐방로 진입이 가능하다.). 이 전망대의 위치는 유대광야 2/3 정도쯤 되는 곳이다. 더 깊숙한 유대광야로 들어갈 수 있지만 그런 곳은 진짜 만반의 준비를 하고 들어가야 한다. 아래 영상은 와디 다르가 전망대에서 헬리켐으로 촬영한 것이다(1080p로 감상하시기 바랍니다.).

 와디 다르가에서 바라본 유대광야는 끝이 없다. 또한 아무 것도 없다. 흙, 돌, 모래와 산, 골짜기만 있을 뿐이다. 이런 지형이 예루살렘과 베들레헴과 헤브론을 잇는 유대산지까지 그대로 이어진다.


와디 다르가 상공에서 베들레헴 방면을 바라보고 찍은 사진이다. 와디의 엄청난 깊이를 볼 수 있다. 사진이 가리키는 방향으로 계속 가면 베들레헴에 이른다.


예루살렘 방향으로 찍은 사진이다. 사진에서 간간히 보이는 푸른색은 물이 흘러가는 길에서만 자라는 풀들이다. 물이 흘러가는 자리를 제외하면 광야는 아무 것도 없다.


유대산지에서 흘러온 물들이 와디를 따라 사해까지 이른다.

 

 전망대로 걸어가면서 보이는 경고문인데 내용이 무섭다. 이스라엘에 비가 많이 오는 시기엔 와디에 엄청난 양의 물이 흘러간다. 분명 유대광야 지역은 해가 쨍쨍 내리쬐고 비가 내리지 않지만, 유대산지에 내린 비나 눈이 와디를 통해 흘러오기 때문에 와디를 지나다닐 땐 항상 예루살렘, 베들레헴, 헤브론 일대의 일기예보를 유심히 살펴야 한다. 실제로 유대산지에 비가 많이 내린 다음 날은 사해지역에 있는 국립공원들은 거의 다 문을 닫고, 도로도 통제되는 경우가 많다. 



전망대를 가리키는 표식이 탐방로에 세워져 있다.


와디 다르가에 물이 흘러가는 계속의 깊이가 상당하다.


유대광야는 걷고 또 걸어도 계속 이런 풍경이 이어진다.


유대산지까지 이어진 유대광야의 모습


물이 흘러가는 자리에는 이렇게 풀들이 자란다.


이런 풀들을 제외하면 정말 아무것도 없다.





WRITTEN BY
Pastor Hwang
성경과 성지의 살아있는 연결을 추구하는

,

 길보아산 전투에서 전사한 사울은 블레셋에 의해 그 시체가 벧샨 성벽에 못박혔다. 오늘날 벧샨은 국립공원으로 지정되어 있으며 고대 벧샨과 더불어 헬라시대와 로마시대에 번창했던 스키토폴리스의 흔적이 잘 보존되어 있다. 아래 영상은 벧샨 일대를 헬리켐으로 촬영한 것이다(1080p로 재생하면 선명합니다.). 벧샨은 지리적으로 아주 중요한 위치에 있다. 북으로는 갈릴리로 향하는 길과 동서로 이스르엘 평야에서 요단강을 건너는 길목에 있으면 남으로는 여리고로 이어지는 도로 위에 있다. 

 고대 벧샨이 있는 텔에 올라서면 길보아산이 한 눈에 바라보인다. 사울의 시체가 옮겨졌을 경로가 머리 속에 그려질 정도다. 벧샨에 못박힌 사울의 시체는 길르앗 야베스 사람들이 가져가 장례를 치렀다. 길르앗 야베스 사람들은 이전에 자신들을 구원해 준 사울의 은혜를 갚았던 것이다.


벧샨 상공에서 서쪽 길보아산을 바라보고 찍은 사진


 길보아산 전투 이후 블레셋이 점령했던 벧샨은 이후 다윗이 다시 점령했다. 이스라엘 왕이 당한 치욕을 되갚는 의미도 있었을 것이다. 솔로몬 왕은 벧샨을 자신의 행정구역에 포함시키고 행정건물들을 세웠다. 하지만 주전 732년 앗수르에 의해 파괴된 이후엔 버려진 도시가 되고 만다.



 하지만 시간이 흘러 주전 3세기 알렉산더의 헬라제국 시대에 이르러 도시는 다시 일어선다. 이름도 벧샨에서 스키토폴리스로 바뀐다. 알렉산더가 죽고 난 후에 알렉산더의 부하 장군이었던 프톨레미와 셀류시드는 스키토폴리스를 놓고 전쟁을 치르기도 했다. 그 정도로 지리적 중요성이 컷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주전 63년 로마의 폼페이가 이스라엘을 점령한 후에 도시는 텔에서 내려와 평지에 자리잡는다. 로마식 도로가 세워지고 아름다운 건축물들이 들어섰다. 이 시기에 만들어진 도로, 목욕탕, 신전, 극장의 흔적들이 비교적 온전하게 발굴된 상태다. 



로마식 극장


로마시대에 세워진 이 극장은 비잔틴 시대까지 사용된 것으로 보인다.


극장건물을 받쳤던 기둥들


스키토폴리스 서쪽에서 발견된 목욕탕에 있는 물을 데우는 시설


스키토폴리스에서 발견된 로마시대 목욕탕은 크기가 100*90m에 달한다.


실바누스 거리 옆에 세워져있는 기둥들


팔라디우스거리의 모습, 뒷편으로 고대벧샨이 있는 텔이 보인다.


비잔틴 시대에 사용된 아고라의 모습, 발굴에 의하면 물건을 사고파는 시장으로도 사용된 것으로 보인다.


고대 벧샨에 있는 이집트 관리의 건물에 발견된 이집트 상형문자가 새겨진 돌


BC 4,000년경의 것으로 추정되는 거주지의 흔적


고대 벧샨에 남아있는 성벽의 흔적



WRITTEN BY
Pastor Hwang
성경과 성지의 살아있는 연결을 추구하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