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이 태어나던 당시 이스라엘 지역의 왕은 헤롯인데, 그는 유대인이 아닌 에돔 출신 이두메 사람이다. 유대인이 아닌 사람이 유대인들의 왕으로 산다는 것은 현대의 우리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힘든 일이었나 보다. 헤롯은 유대인들이 자신을 왕의 자리에서 몰아낼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휩싸여 평생을 살았다. 그래서 그는 예루살렘에서 거리가 먼 광야 지역에 요새들을 여럿 건설해 유대인들의 반란에 대비했는데, 헤로디온이 바로 그런 요새다.

 오늘날 헤로디온은 팔레스틴 자치구역 안에 있는 이스라엘 국립공원이다. 하지만 이스라엘 군대가 군사력으로 통제하는 지역이라 안전하게 접근이 가능하다. 


헤로디온 상공에서 남쪽 유대광야를 바라보고 찍은 사진으로 헤로디온이 위치한 지역의 식생이 잘 나타난다. 황무지는 아니지만, 나무는 없고, 우기가 되면풀이 무성한 땅으로 전형적인 유대산지와 유대광야 경계 지역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아래 영상은 헤로디온 상공을 헬리켐으로 촬영한 것이다(1080p로 재생하면 선명합니다.).

 세상 거의 모든 왕이 그러하듯이 헤롯은 자신의 왕위를 지키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은 왕이었다. 유대인들의 반발을 잠재우기 위해 유대인들의 성전을 증축했고, 자신을 왕으로 인정해준 로마의 가이사 황제에게 잘 보이기 위해서 지중해 연안에 가이사랴를 건설해 황제에게 바쳤다. 또한 실제적 반란을 대비해 인적이 드문 광야 지대에 마사다, 헤로디온, 마케루스같은 요새를 건설했다.   


헤로디온 상공에서 북쪽을 바라보고 찍은 사진이다. 산 정상부를 깍고 성벽으로 둘러싼 방어요새로서의 모습이 잘 보인다. 헤롯의 입장에서는 예루살렘에서 가장 가까운 곳에 있었기에, 반란이 생겼을 경우 즉각적인 대피가 가능한 곳이었다.


 유대인 역사가 요세푸스는 헤로디온에 대해 이렇게 기록했다.

"헤롯은 요새로 사용하기에 적당했던 언덕을 더욱 높게 그리고 둥글게 다듬어 마치 가슴 모양처럼 봉긋하게 만들었다. 요새는 둥근 탑들을 갓고 있고 200개의 계단을 올라가 꼭대기에 다다를 수 있으며 방어가 잘 돼 있었다. 안에는 왕실이 사용하는 화려하게 장식된 방들이 있었다. 물 부족을 해결하기 위해 멀리서 물을 끌어들였으며 요새 주변에는 도시가 형성됐다."


헤로디온 상공에서 내려다 보며 찍은 사진이다. 헤로디온의 구조가 한 눈에 들어온다.


 요세푸스의 기록에 근거하여 1960년대에 이르러 헤로디온 발굴작업이 시작됐으며, 오늘날까지도 지속적인 발굴이 이어지고 있다. 헤로디온 정상부는 지름이 62미터에 달하며, 외벽과 내벽의 이중성벽 구조를 가지고 있다. 4개의 망대가 있는데, 3개는 반원 형태를 하고 있고, 가장 큰 망대는 원형이다. 망대 안에서는 화려한 거주 시설들이 발견되었다. 


헤로디온 북쪽 상공에서 남쪽 방향으로 찍은 사진.

 

 헤로디온은 언덕 위 요새와 언덕 북쪽 넓은 땅에 위치한 연회장과 연못을 비롯한 건물들로 이루어져 있다. 인공으로 조성한 이 연못에 물을 채우기 위해 베들레헴 인근에 있는 저수지에서 이 곳까지 수로를 연결했다. 학자들은 하부 헤로디온 지역이 연못과 연회장을 중심으로 헤롯이 손님들을 접대하기 위해 사용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헤로디온 정상부의 북동쪽 사면에서는 로마식 극장과 해롯의 무덤으로 추정되는 건물이 발견되었다. 이것이 진짜 헤롯의 무덤인지에 대해서는 아직도 의견이 분분하다.

 

헤로디온 동북쪽 사면을 촬영한 사진이다. 헤롯의 무덤을 추정되는 부분과 로마식 극장을 볼 수 있다.


 헤로디온은 헤롯이 유대인들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만든 요새다. 하지만 그의 살아 생전에는 이 요새가 요긴히 쓰일 정도의 급박한 상황은 없었다는 점과 오히려 헤로디온을 요긴하게 사용한 사람들은 유대인이라는 사실은 참 역설적이다. 주후 70년과 123년에 로마에 대항해서 유대인 반란이 일어났을 때 헤로디온은 마사다와 함께 유대인들의 중요 거점이 되었다. 

 또한 헤롯은 헤로디온 정상부 아래의 암반을 깍아서 거대한 물 저장창고를 여러개 만들어 놓았는데, 유대인 반란 때 유대인들이 게릴라 작전을 펼치기 위해 이 각각의 물 저장창고들을 미로같은 터널로 연결시켰다. 아래 영상은 실제 터널과 물 저장창고를 촬영한 것이다.(720p로 재생하면 선명합니다.).

 

"이에 헤롯이 박사들에게 속은 줄 알고 심히 노하여 사람을 보내어 베들레헴과 그 모든 지경 안에 있는 사내아이를 박사들에게 자세히 알아본 그 때를 기준하여 두 살부터 그 아래로 다 죽이니" 마태복음 2장 16절

 평생동안 유대인들의 반역을 두려워하며 자신의 왕위를 지키기 위해 노력했던 헤롯은 예수님이 태어나셨던 당시 베들레헴의 모든 남자 아기들을 죽였다. 그가 얼마나 자신의 왕위를 지키는 데 혈안이 되어있었는지를 잘 보여주는 사건이다. 헤로디온도 그런 헤롯의 두려움이 만들어낸 건축물이다. 광야의 헤로디온으로 오르면서 안도했을 헤롯을 떠올려보면, 그가 얼마나 어리석고 불쌍한 삶을 살았는지 느낄 수 있다.


헤로디온 복원도를 바탕으로 제작한 모형, 상부 헤로디온에 전시되어 있다.


헤로디온 지하에 있는 물 저장창고. 이런 거대한 물 저장창고는 적의 침략시 보급이 끊겨도 장기간 저항을 가능하게 했다.


유대인 반란 때 유대인들이 만들어놓은 터널의 입체 그림이다.


지금 현재도 로마식 극장 위쪽에 있는 건물의 벽화 복원이 한창이다.


헤롯의 무덤으로 추정되는 자리.


유대인 반란 당시 유대인들이 로마군을 맞아 헤로디온 방어를 위해 사용했던 돌들의 모습.












WRITTEN BY
Pastor Hwang
성경과 성지의 살아있는 연결을 추구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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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경에 등장하는 엘리야 이야기 중에 가장 극적인 것은 엘리야가 갈멜산 제단에 하늘의 불을 내리는 순간이다. 바알과 아세라를 섬기던 당시 북이스라엘의 왕 아합과 그의 아내 이세벨, 그리고 그들의 선지자 850명과의 대결에서 승리한 엘리야의 이야기는 어쩌면 블레셋 거인 장수 골리앗을 물리쳤던 소년 다윗의 이야기보다 더 극적이다. 성경에 기록된 극적인 이야기들에는 하나님을 신뢰하는 사람을 지키시는 하나님이라는 공통적인 주제가 들어있다. 갈멜산에서 벌어졌던 엘리야의 이야기는 하나님만을 신뢰했던 엘리야 선지자와 하나님 뿐만 아니라 바알과 아세라도 섬겼던 당시 북이스라엘의 타락한 지도자들과의 정면 승부에서 엘리야가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승리한 사건이다. 


 하나님과 엘리야가 승리한 장소 갈멜산은 이스르엘 골짜기와 지중해가 만나는 오늘날 이스라엘의 북서부 도시인 하이파에 인접해있다. 갈멜산은 높은 산은 아니지만 이스라엘이라는 땅에서 보자면 상당히 넓은 면적을 가진 편이다. 아래 영상은 엘리야 기념교회 상공에서 갈멜산 일대를 헬리켐으로 촬영한 것이다(1080P로 재생하면 선명합니다.).

 갈멜산은 설악산이나 지리산같은이 산세가 깊고 험한 산이 아니다. 우리나라로 치자면 동네 뒷산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크고, 그렇다고 산이라고 하기에는 다소 야트막한 느낌이 있다. 어쨋든 갈멜이라는 이름에는 하나님의 정원이라는 뜻이 있다. 그 정도로 갈멜산은 이스라엘 안에서는 상당히 울창한 숲을 자랑한다. 지중해 연안에 있기 때문에 강수량도 많은 편이고, 이스르엘 평원의 초입에 있어서 토양도 비옥하다. 산 정상부까지 도로가 놓여 있어서 자동차로 산 전체를 둘러볼 수 있는데, 차창 밖으로 보이는 빽빽한 나무들이 인상적인 산이다. 


 갈멜산 정상부에는 무크라카(불의 제단)라고 불리는 엘리야 기념교회가 있다. 이 기념교회 옥상 전망대에 올라가면 이스라엘 최대의 곡창지대인 이스르엘 평원이 한 눈에 들어온다. 동북쪽으로 바라보면 드보라가 가나안 철병거를 이긴 다볼산, 기드온이 미디안을 물리친 모레산, 사울왕이 전사한 길보아산도 볼 수 있다.  


갈멜산 상공에서 동북쪽 방면으로 내려다보면 이스르엘 평원이 펼쳐지고 평원이 끝나는 부분에 다볼산, 모레산, 길보아산이 보인다. 날씨가 맑을 때는 요르단도 보인다.


 엘리야는 제단에 불을 내린 후에 이스라엘 백성들과 함께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들을 기손 시내에서 처단했다. 

"엘리야가 그들에게 이르되 바알의 선지자를 잡되 하나도 도망하지 못하게 하라 하매 곧 잡은지라 엘리야가 그들을 기손 시내에 내려다가 거기서 죽이니라" 열왕기상 18장 40절

 오늘날 기손 시내는 흔적만 남아있는 상태다. 세계에서 손꼽히는 물관리 체계를 갖춘, 그래서 거의 모든 수자원을 철저히 관리하는 현대 이스라엘에서 자연적으로 생겨난 과거의 물길을 찾기는 어렵다. 과거의 기록에 따르면 기손 시내는 갈멜산 인근에서 벧샨을 지나 요단강에 이르는 일종의 와디였던 것으로 보인다. 평소에는 물길만 있다가 우기에 범람하는데 범람할 때의 규모가 어마어마 했다고 전해진다. 시스라의 가나안 철병거가 진흙에 빠진 것도 이 기손 시내의 범람으로 인한 것으로 학자들은 보고 있다. 엘리야가 바알 선지자들을 처단할 때는 오랜 가뭄이 있었으므로 아마 기손 시내는 바짝 말라있었을 것이다. 


현대 이스라엘에서 물관리 시스템이 갖춰진 이후로 이스르엘 평원은 더이상 범람하지 않으며, 일년 내내 푸르름을 유지한다.


 갈멜산에서는 엘리야가 불을 내린 제단을 찾으려는 많은 사람들의 노력이 있었으며, 그 결과물이 바로 엘리야 기념교회다. 물론 확실한 증거는 없다. 하지만 실제로 기념교회가 자리하고 있는 엘리야산 정상부에서는 곳곳에 돌출된 넓은 암반층을 눈으로 볼 수 있다.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이 곳을 엘리야의 제단이 있었던 곳으로 생각하고 있다. 오늘날 엘리야 기념교회는 성지순례의 필수코스 중 하나로서 수많은 사람들이 드나들고 있다. 이스르엘 골짜기를 한 눈에 바라볼 수 있기 때문에 성경적으로 할 수 있는 이야기도 많고, 신앙적으로 생각할 거리도 많은 곳이다. 


기념교회를 둘러싼 암반층의 모습. 이 일대에는 자연적으로 생성된 동굴들도 많이 존재한다. 역사적 기록에 의하면 선지자들이 이런 동굴을 주거지로 사용했다.


"이스라엘의 신앙을 집대성한 사람은 모세지만, 이스라엘의 신앙을 지켜낸 사람은 엘리야다." 

 출애굽 이후 가나안에 정착한 이스라엘은 왕국 분열 이후에 특히 북이스라엘에서 종교적 타락의 극단을 내달렸으며, 조상들이 섬겼던 하나님을 가나안의 수많은 신들과 다름없는 신들 중의 하나로 여기는 상태였다. 이런 종교적 타락의 중심에 아합왕과 이세벨 왕비와 그들을 따르는 선지자 850명이 있었다. 엘리야는 하나님 신앙과 가나안 신앙을 혼합시킨 그들을 모두 죽이고 하나님이 가나안의 모든 신들보다 훨씬 강력하다는 것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보여준 선지자다. 


"모든 백성이 보고 엎드려 말하되 여호와 그는 하나님이시로다 여호와 그는 하나님이시로다 하니" 열왕기상 18장 39절 

 엘리야가 이긴 후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렇게 고백했다. 하나님만이 참된 신임을 가르쳐준 갈멜산은 오늘날 우리 신앙에 많은 도전을 준다. 

 

오늘날 남아있는 기손 시내의 물길


다볼산, 모레산, 길보아산의 모습


엘리야 기념교회의 내부와 제단


엘리야 기념교회 마당에 세워져 있는 엘리야 동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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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stor Hwa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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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날 가버나움 유적은 갈릴리 호수 북쪽 거의 정중앙에 위치해 있다. 예루살렘에서 갈릴리 남쪽까지 올라간 다음 갈릴리 호수를 따라 30분 정도 차를 타고 더 올라가야 도착한다. 갈릴리 호수의 해안선을 따라 이어진 도로의 경치는 참 아름답다. 이스라엘이라는 나라 자체는 대체로 경치가 삭막하지만 갈릴리는 예외다. 정말 아름답다. 갈릴리 호수에 가면 가끔씩 이런 멋진 곳을 거니시던 예수님과 제자들의 모습이 생각나기도 한다.


갈릴리 호수 북쪽 방향으로 가버나움 전체를 바라보며 찍은 사진이다. 사진에서 보이듯이 갈릴수 호수 주변의 풍경은 유럽에 온듯한 착각을 불러 일으킨다.


갈릴리 호수에 바로 인접해있는 어업도시였던 가버나움의 지리적 위치를 확인할 수 있다.


가버나움 상공에서 아래를 바라보며 찍은 사진이다. 회당터와 집터의 구조를 확인할 수 있다.


 복음서를 읽어보면 공생애 3년 대부분의 시간을 갈릴리 지역에서 보내셨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갈릴리 사역의 중심지는 가버나움이다. 가버나움은 예수님이 보여주신 수많은 기적들의 무대다. 하지만 동시에 그런 신적인 기적들을 보고도 예수님을 믿지 않아서 예수님의 책망을 받은 도시이기도 하다. 예수님은 가버나움 회당에서 귀신을 쫓고, 베드로의 장모가 열병으로 죽어갈 때 고쳐주셨으며, 회당에서 가르치셨고, 가버나움 주변 한적한 들에서 복음을 전파하셨다. 아래 영상은 가버나움 일대를 헬리켐으로 촬영한 것이다(1080p로 재생하면 선명한 화질로 볼 수 있습니다.).



 가버나움은 갈릴리 지역에서 가장 발달한 어업도시였던 것으로 학자들은 보고있다. 다메섹에서 가이사랴를 거쳐 이집트까지 이어지는 국제 무역도로인 바닷길(Via Maris)은 가버나움을 지나갔다. 가버나움 유적지에서는 바닷길이 지나감을 알리는 마일스톤이 발견되었다. 국제도로를 따라 움직이는 무역상들과 수많은 사람들이 갈릴리 지역을 거쳐갈 때 가버나움을 들렀을 것이며, 이 곳에서 쉬고 먹고 자며 물건과 음식을 구입했다. 자연히 가버나움은 갈릴리에서 가장 번성한 도시가 되었을 것이다.


가버나움에서 갈릴리 남쪽 방면을 찍은 사진이다. 사해와 마찬가지로 바다로 불리는 호수답게 상당히 큰 호수임을 확인할 수 있다.


갈릴리 동편 골란고원으로 이어지는 지역을 바라보고 찍은 사진이다. 갈릴리 호수도 사해와 마찬가지로 양쪽면이 불쑥 솟아올라 있어 위에서 보면 움푹 꺼진 것 처럼 보이는 형태를 가지고 있다. 갈릴리 호수 사방을 높은 산이 둘러싸고 있는 형상이며, 요단강으로 이어지는 남쪽 부분만 산이 없다.


 1900년대 초반 이루어진 대규모 발굴 작업으로 가버나움 회당과 집터 그리고 베드로의 집이라고 알려진 교회터 등 많은 유적들이 발견되었다. 회당은 1세기 회당터 위에 여러번 증축된 것으로 시대별로 다른 색깔의 층들이 쌓여진 것을 볼 수 있다. 또한 베드로의 집이라고 여겨지는 집터가 발견되었는데, 가장 밑에 주전 1세기에 처음 지어진 집이 있고 그 위로 4세기와 5세기에 걸쳐 교회가 세워진 흔적이 있다. 여기서 많은 양의 기독교 관련 비문이과 십자가 장식들이 발견되었는데, 특이한 점은 살림도구들이 발견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래서 대부분의 학자들은 이 집이 처음에는 개인 소유의 집이었으나 점차 교회의 용도로 사용되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더 나아가 이 집을 예수님이 가버나움에 머무시는 동안 베드로의 장모를 고쳐준 집으로 보고 후대에 이것을 기념하는 교회를 이곳에 세웠을 것으로 생각하기도 한다. 

 물론 학자들의 추정이 항상 정확한 역사적 사실일 수는 없지만, 4세기 5세기에 세워진 교회의 흔적으로 보아 초기 기독교회에서도 이 집터에 많은 의미를 부여했던 것만은 사실인 듯 하다. 오늘날 가버나움 유적지는 로마 카톨릭에서 관리하고 있으며, 이스라엘 찾는 순례객들은 반드시 거쳐가는 장소 중의 하나로 항상 많은 순례객들로 붐비고 있다. 


가버나움 회당의 모습


밑에 검은 현무암이 1세기 회당의 흔적이고, 위에 흰색 돌은 후대에 증축된 회당이다.


시대별로 다른 기초석의 색깔


베드로의 집으로 알려진 집터


회당과 교회 사이에 있는 거주지의 흔적


가버나움에서 발굴된 과일과 나뭇잎을 조각한 기둥장식


올리브 압착에 사용된 맷돌. 갈릴리 주변에 검은색 현무암을 사용한 맷돌이 많이 발견된다.


다윗이 법궤를 옮기는 장면을 조각한 장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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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stor Hwa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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